일상적인 2024년 회고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평범하게 행복하고, 쾌적하고, 즐겁다. 그저 23년에서 이어받은 씨앗들이 꽃을 피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 이쯤에는 좀 더 막연한 기대에 차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밀려오는 불운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운을 어떻게든 해결했다는 해방감을 느끼면서, 그 와중에 새로 찾은 행복들을 새해에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새해 다짐이 무색하게도, 2024년은 별 극적인 일 없이 평범하게 지나갔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평범하게 행복하고, 쾌적하고, 즐겁다. 그저 23년에서 이어받은 씨앗들이 꽃을 피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 23년보다 방탈출을 훨씬 덜 갔다.
  • 더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과 별로 친해지지 않았다.
  • 운동 성과가 별로 나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조금씩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고통 속에서는 살 구멍을 열심히 찾지만, 일상이 나름 괜찮으면 비일상을 굳이 찾지 않게 되는 법인가보다.

2024년을 상징하는 노래는 녹황색사회의 Sabotage다.

일상

별 일 없었다! 특히 상반기는 정말 별 일 없었다.

상반기에 회사에서는 주로 작년에 개발해 놓고 배포 밀렸던 것을 배포하는 일과, 단순한 외부 서비스 연동 작업을 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특별히 어렵거나 하기 싫은 게 아니어서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2월부터 4월은 파이널 판타지 7 리버스의 출시로 소멸했다.

얼굴로 다해먹는 우리장르 에이스

이 게임은 정말 잘 만든 게임이다. 전투와 미니게임이라는 두 축이 모두 역대급이다. 객관적으로 GOTY를 휩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요 시상식에서 많이 낙선해서 분노하고 있다.

이외에도 1년 동안 래빗 앤 스틸, 메타포: 리판타지오 등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네트워킹

아웃프콘, NYPC Alumni, 글또까지.

인프콘이 아니라 아웃프콘

인프콘은 코엑스에서 열리는 대규모 개발 컨퍼런스다. 참가권을 추첨을 통해 판매하며, 8:1의 경쟁률을 자랑한다. 나는 인프콘에 추첨까지 해서 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인프콘 떨어진 사람들의 모임, 아웃프콘을 연다고 하면 당연히 가야 한다.

아웃프콘은 seha 님의 주최로 카페를 대관하여 진행되었다. 전반적으로 그냥 테이블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치만 이런 모임을 굳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당연히... 재밌다. 인프콘 <<<<<<< 넘사벽 <<<<<<< 아웃프콘.

여기서 새로 알게 된 분들이 몇 분 있다. 다들 흥미로운 분들이어서 이후에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다.

넥슨 청소년 프로그래밍 챌린지와 함께하는 매년

올해는 넥슨에서 역대 NYPC 수상자들을 모아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시켜 줬다. 제주도에 있는 학교에서 교육 봉사도 하고, 관광도 하는 일정이었다.

상 딴지도 어연 5년, 이제 연락 오면 죄송할 지경이다. 나는 불러 주는 다른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러 주는 만큼 계속 충성스럽게 가야 하지 않을까.

고용주인 회사보다 관계 없는 넥슨이 복지를 잘 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비행기를 탄 것은 처음이다. 여행도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더라.

알고리즘판 사람들 하나하나는 대부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나도 몇 년간 알고리즘판에서 구른 사람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거리감은 느껴진다, 그들의 준거 집단과 나는 꽤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내 정체성은 학자도 엔지니어도 아닌 (모던) 프로그래머인데 판에 그런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내 자신의 학술적 성장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라는 것까지 겹쳐져서, 좀 호승심이 일었다. 공부에 선택지는 몇 가지가 있다.

  1. 회사를 다니면서 충분한 속도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2. 백수로서 공부한다.
  3. 대학원에 간다.

나는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순수하게 능력치만으로 재밌는 공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회사 다니는 동안 그러지 못 하고 있는 상태다. 내 정체성도 좋고, 학계가 싫어서 그 바깥에 있는 것도 좋은데, 공부를 못하는 나는 참을 수 없다.

2025년에는 좋으나 싫으나 결론을 내야 한다. 결론은 최대한 일찍 내고, 25년 후반기에는 본격적으로 액션을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글또(개발자 글쓰기 모임)

2주마다 글 하나씩 쓰는 온라인 모임이다. 현재 마지막 기수라고 하는데, 블로그에 글 쓸 동기가 필요했던 시기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재밌어 보여서 들어갔다.

사실 시작할 때는 좀 쎄했다.

일반적인 개발자 커뮤니티랑은 다른 정책들이었고, 이런 부분이 슬랙에 올라왔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 개발자답지 않다고 느껴졌다.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학교 한 학년 정도 되는 인원을 모아서 저렇게 운영하는 게 참 대단한 것 같다. 몇 달 새 블로그 글도 많이 작성했고, 사람들도 몇 번 만났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의 품질도 좋은 편이라 열심히 읽고 있다.

글 하나를 쓰더라도 기존에 없는 새로운 요소를 넣어서 쓰고 싶어서, 글 주제를 2주마다 생각해내는 게 어렵다. 글또가 끝나면 내게 맞는 패턴을 찾아가야겠다.

회사

과업 받아들고 코드 짤 생각은 안 한 채 돌다리 두드리는 습관을 1년 간직한 결과 나름 도메인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조직 개편이 있었던 뒤로 담당하게 된 서비스가 늘었고, 특히 서비스 하나는 내가 단독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에 보지 않아도 되었던 결제 유형도 공부하게 됐다. 정말 결제의 전과정을 모두 경험하게 되어서, 회사에 있는 그 누구보다 결제 관련 기술적 요구사항에 대해 정통하게 된 것 같다.

한편 7월에는 회사 생활에 즐거운 변화가 있었다.

키위유. 털빛 힘의 참전.

마인크래프트를 계기로 만나 온라인에서 헛소리를 함께한지 9년쯤 된 난노, 파차, 키위 중 한 명 키위유를 우리 팀으로 입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키위유는 백준 온라인 저지에서 실행시간 1위를 차지하기 위해 흑마법을 동원하는 basm 프로젝트 창시자로 유명하다. 많은 문제에서 1위에 랭크되어 있고, 압도적인 실행시간을 무기로 문제의 정해를 부숴 버리는 경우도 많다.

반복문으로 되던데?

오자마자 팀 로드맵 하나를 단독으로 성공시키는 것을 비롯해 멋진 활약 중이다.

생산성이 좋으면서 코딩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다. 나는 코드베이스에 있는 문제를 잘 발견하지만 그걸 고치기 위한 생산성은 떨어지는데, 뒷자리에 실시간 코드 수정 기계가 있으니 부담이 없다.

문명식으로 말하자면 비커 생산량만 남아 도는 상태였는데 옆에 제조공장 단지를 지은 격이다. 망치가 쏟아져 나온다.

위대한 기술가는 망치를 생산한다

그리고 올해도 연말 상장을 받았다. 기분이 좋다.

내년에는

학교를 떠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세기말이다. 14~16년에 중학생, 17~19년에 고등학생, 20~22년에 대학생, 23~25년에 직장인이라는 3년 주기를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2025년에는 이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모두 끝마치는 것이 목표다. 꼬인 부분을 모두 풀 것이다. 회사에 만족하고 있으므로 무조건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갈 곳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걸 핑계로 일을 미룰 수는 없다.

또, 이번에는 일상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비일상 또한 내가 찾으러 나서야 얻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엄청난 비일상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일·게임·운동·잠 4가지가 아닌 다른 일을 좀 하고 싶다는 거니까 좀 노력해 보자.

마지막으로 가정방문 잘 안 오시는 트친들을 위한 올해의 주요 트윗들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국, 다들 힘내시고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