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인 2023년 회고
전통적으로 매년을 상징하는 음악을 고른다. 그 해 자주 들었던 노동요면서, 내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됐던 것들이다. 전부 오타쿠스러운 선곡이라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록 안 해 두면 까먹으니까 적어 본다.
01년생이니까 연도가 한국 나이와 일치한다.
- 17: Tell Your World
- 18~19: Above (하이큐!! OST)
- 20~21: 단독 승리 (ひとりがち)
- 22: Close in the Distance (파이널 판타지 XIV: 효월의 종언 OST)
23년은 어떤 음악을 골라야 하는지 고민이 됐는데,지금 내게 가장 와닿는 노래는 요아소비의 [러브레터]인 것 같다.
가사는 '음악'에게 좋아한다고 고맙다고 주접 떠는 내용이다. 내가 갑자기 음악에 빠져 버렸다는 건 아니고.
공동체에는 사람을 발현시킬 힘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사람들과 공동체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렇게 쌓아올린 결과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배웠고, 나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잘 먹히지 않는다. 자극이 될 사람을 찾기는 커녕 이미 있는 사람들을 견뎌내는 것조차 벅차다. 힘들다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었고,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특이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이제 나한테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동시에 좀 다른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난하게 공부나 했던 대학 시절, 끝을 모르고 성장했던 고교 시절, 그리고 이제는 세상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마인크래프트 시절보다도 전부터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항상 좋아해 왔던 것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고, 계속 나를 이끌어 줄 것임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곡은 러브레터다.
쓰고 보니까 무슨 크리스천 같이 써 놨는데 그냥 내가 긍정충인 거고 신하고는 관계 없다.
졸업을 하다
2022년이 끝남과 함께 졸업논문을 내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됐다. 대학 입학 후 3년만의 성과다.
그 시절 트윗들 보니까 훌륭한 잉여다. rustc 기여라거나, Coq(이제 Rocq), Kubernetes 공부 같은 것들을 시도했었고, 지금 와서 크게 자랑스러운 성과는 없지만 어쨌든 혼자서도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초고속 졸업의 여유를 즐기나 했는데
얘가 수능 35266을 가지고 라프텔에 잡혀가는 바람에 시계가 꼬였다. 고3이 대학 다 떨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연락하는 건 무슨 종류의 회사냐.
그렇게 3년졸을 하고도 3살 어린 친구보다 취업을 늦게 하게 된 불쌍한 처지가 된 나는, 지인이 추천해 준 대로 몰로코에 지원을 넣었다.
몰로코 면접 경험은... 솔직히 좋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면접관으로 오신 분들이나 나나 서로를 이상하게 여겼던 것 같다. 잘 안 맞는 회사라는 걸 느꼈으니 그쪽에서 불합격 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쏘카에서 나한테 연락한 적이 있어서 쏘카도 지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키보드 단축키 안 쓴다고 CTO가 개발자한테 소리 지른 것 때문에 웹상에서 화제가 돼서, 트위터에서 한바탕 비판한 다음에 지원할 마음을 접었다. 그 사건 하나로 회사를 단정적으로 평가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까고 나서 바로 입사해서 같이 일을 하기는 좀 그랬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회사들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 2023년 최대의 고통이 닥쳤다.
떠넘김당한 일
내가 발 걸치고 있는 마인크래프트 팀 중 하나에서 연락이 왔다. 일 하나를 맡아서 마무리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군대를 가게 생겼는데 외부와의 계약이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라고 했다.
평소에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마침 백수 상태라 흔쾌히 받았다. 큰 일 필요 없고 마무리만 맡아 주면 된다고 했으니 부담도 없었다.
그런 얘기를 나눈 상태로 기다리는데 군대 간다는 전 날까지도 파일이 안 온다. 결국 입소 당일에 파일을 받아 확인하는데...
이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싶었다. 적당히 마무리해서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솔직히 프로젝트 엎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남의 프로젝트라 내 맘대로 엎지도 못하고, 떠넘긴 당사자는 연락도 씹는 상태라 억지로 이걸 완성해내야 했다. 탈주하기에는 내가 나름 애정을 가진 팀이었다.
내 능력과 인맥과 시간을 다 동원해서 몇 달에 걸쳐 문제를 해결해 내기는 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우선 졸업 직후의 귀한 백수 기간에 무언가 재밌는 것을 해 볼 시간과 의욕이 사라졌고 (덕분에 다른 프로젝트 하나 엎어졌다), 여러모로 인류애도 잃고, 취업 늦어진 건 물론인 데다 내 군문제 해결도 1년 늦어졌다.
자기 군대 간다고 이 모든 일을 벌인 팀원께서는 아직도 자기가 어느 정도 규모로 일을 망쳤는지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계신 것 같기 때문에, 전역 후에 정식으로 징계위를 열어야 하지 않나 고민하고 있다.
뜬금없이 내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이라 세부적으로 할 얘기가 정말 많지만, 진정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겠다.
인생 첫 직장
그렇게 백수로 5개월쯤 보내고 있었다. 몰로코 면접의 좋지 못한 기억이 있는 상태에서 백수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건 약간 우울한 일이었다. 내가 일을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는지 확신을 못 하던 상태이기도 했다.
떠넘김당한 일을 해결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기보다 빨리 일 할 만한 회사 하나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그래서 오라던 회사 중에 구성원적으로 흥미가 있었던 포트원에 지원했다. 결과적으로는 크게 만족하고 있지만 막상 지원할 당시에는 그렇게 열심히 비교해서 고른 건 아니었다.
그렇게 두 차례의 면접을 거쳐 바로 출근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지금은 수습 평가도 마치고 정규직 전환까지 되었다.
꿈을 이루다
이 시점에서 나는 꿈을 이뤘다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백엔드 개발자라는 특정한 직무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결제 시스템도 이 회사가 아니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물건이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릴 적부터 상상했던 정확히 그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기술을 배우고 추상화를 고민하는 일 자체가 즐겁다.
물론 더 어려운 꿈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수록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법이다. 지난 몇 년간의 여정을 통해 가지게 된 여러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을 이뤄냈다는 것이 그 자체로 만족스럽다.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자.
기술적인 경험
회사에서 Scala, Kotlin, TypeScript를 같이 만지고 있다. 가끔 Rust랑 Java도 한다. 함수형 프로그래밍을 깊게 쓰지는 않아도 전범위적으로 쓰고 있다. 경험할 게 정말 많은 회사라, 회사에서 일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회사 블로그로든 개인 블로그로든 풀 게 많을 것 같다.
나는... 많은 기여를 하긴 했다. 구조적 개선을 중심으로 많이 했다. 막 졸업한 신입 개발자답게, "내가 더 낫게 고칠 수 있어!" 정신으로 많은 걸 제안하고 실행했으며, 지금도 크고 작게 일이 쌓여 있다. 팀원들이 이런 걸 좋게 봐 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솔직히 다 필요한 작업들이기는 했고 내가 설계를 잘했다(?)
아쉬운 점은 역시 타고난 게으름이다. 내가 생산성 면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개발자가 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몰입하는 법을 익히고, 사소한 문제 하나하나에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겠다.
입사 전에는 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해서 문맥 전환 비용이 너무 큰 상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까 마이크로서비스 여러 개에 기여하는데도 몰입이 안 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사 송년회에서는 상장을 받았다. 오 그래도 회사생활 망하고 있지는 않구나.
운동하는 나날
무려 내가 운동을 한다.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몸무게는 48kg에서 55kg까지 올랐다.
어차피 내가 운동에 관심을 가질 일은 없기 때문에, 그냥 돈을 발라서 PT를 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지금도 내가 무슨 운동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순수하게 PT쌤의 성과로 근력이 오르는 중이다.
몸집이 엄청 커졌다든가 하는 변화는 아니지만, 일단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이다. 몇 년 더 있으면 정상 체형도 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각종 모임
다른 회고를 보면 어느 행사를 가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경험을 했다는 내용들이 많이 보이던데, 나는 딱히 없다. 엑셀콘도 갔고 몇 가지 행사가 있기는 했는데, 나한테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진짜 발표를 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친목 유닛 하나가 잘 커서 정말 친하게 지내고 있다. 길게는 8년지기쯤 되는 사람들인데, 한 명의 전역과 두 명의 졸업, 그리고 적당히 바깥에서 끌어온 사람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만나는 빈도가 높다. 머리에 별로 힘 안 주고 행동하고 있는데, 나를 견뎌 주는 인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방탈출을 꽤 다녔다. 딱 내 취향의 액티비티다. 아직 실력이 좀 부족하다고 느끼긴 해도, 특별히 난이도가 높거나 억지가 있는 방탈출이 아니면 적당히 즐길 만한 정도까지는 올라왔다.
올해 한 방탈출 평가 (좋았던 순서대로)
- 드림포스트 : 다시, 꿈꾸는 마을로... S++
- 고백 S+
- WANNA GO HOME S+
- 홀리데이 S
-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기로 했다 A
- 스테이시 A
- 신의실수 B
드림포스트가 정말 인생테마라고 할 정도로 좋았고, [행복이라 부르기로 했다]는 세간의 호평에 비해서는 상당히 별로였다. 전체적으로 규모 크고 활동성 있고 장치 많이 들어간 걸 선호하는 것 같다.
총평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휘말린" 한 해였다. 한 해 대부분의 기간을 남들이 일으킨 문제를 수습하면서 보냈고, 손해를 정말 많이 봤다. 한편 잘 풀리는 일들은 내 노력과는 상관 없이 잘 풀렸다. 불운과 행운 속에서 내 의지로 된 것은 단지 운동뿐이다.
불운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행운만 내년으로 넘겨 주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딱히 내가 잘 해서 얻은 행운은 아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받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가정방문 잘 안 오시는 트친들을 위한 올해의 주요 트윗들
그리고 여기부터는 소프트웨어 생태계 환멸감
이상으로 2023년 회고를 마친다.
다들 내년에 뵙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